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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Diary

이별을 겪고 있는가

사랑하는 것과 이별해 본 경험이 많지 않다.

 7살 때, 처음으로 갖고 싶다고 말해서 받은 커다란 분홍토끼인형 아롱이와의 이별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전에 학교에서 돌아온 후, 이미 세탁기에 들어갔다 나와 건조대 위에 엎어져 있는 모습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그 때 이후로 솜이 뭉친 아롱이의 팔을 보며 늘 마음 한 켠이 아팠던 씁쓸한 기억이 있다. 아마 처음과 달라진 모습에 대해 미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고 20년 쯤 후, (분홍색은 아니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갈색의 토끼와는 아직 이별을 하지 않았다. 15년 내외를 사는 토끼의 수명 - \집토끼를 감안하면 10년 이하- 에 맞춰, 어느 날인가부터 급작스러운 이별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시작했다. 마음의 준비는 곧 행동으로 이어진다. 보관 문제로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사진들을 일단 모으기 시작했고, 용량 문제로 저장하지 않은 동영상을 보관하기 위해 유튜브 채널을 열었다. 날 닮아 타고난 건강체질이라 여기며 '막 키워도 잘 자란 초사이언토끼'라는 자부심은, 그 아이가 떠난 후 무지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후회하지 않기 위해 건강관리도 조금씩 더 신경쓰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 것과 살아있는 것에 대한 이별을 마주해 보아도, 막상 겪고 있는 이별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 어떤 이별이든 과연 분류나 예시가 가능한 걸까.

 나를 있게 한 사람과 의도한 이별도 해봤고, 나를 아끼던 사람의 의지가 담긴 이별도 겪어봤지만, 내가 아끼던 사람과 나의 의지로 이별한다는 것은 확실히 이전의 경험들과는 또다른 감정이다. 어쩌면 이미 몇 번을 경험했었을지도 모르는 그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은 제대로 느끼지 못할만큼 특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는 그 흔한 말은 그저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일지 모르지만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순간을 맞이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내 맘대로 되는 것보다는 많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면서, 또 그것이 사람의 마음과 관련된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는 걸 알게되면서 조금 더 의연한 척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속성이든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어제 나를 절망에 빠뜨린 무엇인가가 오늘의 나를 즐겁게 만들기도 하고, 지금 내가 행복한 이유가 내일은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인식하는 이 감정은 지나간 행복이 남긴 대가성을 가진 것이다. 내가 사랑한 것, 또는 나를 사랑했던 것이 남긴 흔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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