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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Book

잘해봐야 시체가 되겠지만

나 역시 '죽을지도 몰라서'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거절하고 취소하는 건 처음이었다. 혹시 그동안 내가 무심코 지나쳤던 누군가의 이메일 한 구절도 사실은 죽음을 의미한 적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여러 군데 메일을 보내다가 문득 이것이 소위 말하는 신변정리라는 걸 깨달았다. '신변정리'라는 건 굉장히 거창한 일인 줄 알았지. 하긴 나는 죽음도 거대한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닥쳐보니 죽음이란 건 실로 간단했다. 내가 있을거라 믿어 의심지 않았던 자리에 내 몸이 없을 거라는 의미였다. 나의 스케불러에 '그날' 이후 적힐 계획이 없을 거라는 의미였다. 심지어 그것은 큰일도 아니엇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압축될 수도 있었다. (p.12)

 

지금 우리는 마치 살인 청부업자 같잖아. 영화 [펄프 픽션]에 나오는 사람들 같다고. 그들은 차 안에 앉아서 샌드위치 얘기나 주고받으며 노닥거리다가도 누군가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러 가지. 우리가 여기 차에 앉아 잡담하고 ㅗ있다가, 지금은 시체를 찾으로 가는 것 처럼. (p.86)

 

"죄의식이라고. 난 이런 걸 여러 번 보았지. 저 여자는 몇 년 동안 자기 어머니를 찾아뵙지도 않았어. 그러고는 지금 엄마 없이는 못 살 것처럼 굴고 있는 거야. 다 헛소리야, 캣." 그가 말했다. 그의 말이 맞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p.88)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이후 떠오른 여러 교훈 중 하나는, 미국인들이 주요 도시의 길거리에서 뜻밖의 시체들을 보는 데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절제된 표현입니다, 박사님.
크리스와 내가 '엄마'를 그녀의 집 앞문에서 밴 뒷좌석까지 운구하는 몇 분 동안 우리는 개 산책시키는 사람들과 요가하러 가는 주부들에세 싼 값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전율을 안겨 준 셈이다. 상실의 조짐, 그들 자신고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맛보여준 것이다. (p.90)

 

어쩌면 그 아기는 내가 울어주지 않은 다른 모든 아기들의 상징이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5시가 되기 전에 시신 다섯 구를 화장해야 하는 내 소임을 다하다 보면,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울어주지 못한 아기들 말이다.
아니면 그 아기의 푸른 눈을 보니, 나 자신의 약간은 원초적이고 자아도취적인 면이 환기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난 화장을 '당하'는 게 아니라 화장을 '하기'위해 살아 있으니 말이다. 내 심장은 뛰고 있지만 그 아기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p.145)

 

빅토리아 시대에는 성과 섹슈얼리티가 문화적 금기였다면, 현대에 와서는 죽음과 죽는다는 것이 금기 사항이 되었다. ... 미국의 낙관주의가 화장과 화학약품으로 시신을 미화하는 쪽으로 갔다면, 영국의 비관주의는 예의 바른 사회에서 시신과 장례를 아예 치워버리는 쪽으로 갔다. (p.165)

 

그들의 지친 두 눈은 흐리멍덩하게 허공을 응시한다. 입은 에드바르트 뭉크의 그림 [절규]에 나오는 것처럼 쫙 벌어져 있다.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다. 이런 이미지는 정상적인 생물학적 죽음의 과정을 반영하지만, 가족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가격표에 써 있듯이, 장의업체라면 어디서나 보통 '모양을 만드는' 비용으로 175~500달러를 가족에게 청구한다. 그래서 시신들은 '평화롭고' '자연스럽고' '편히 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p.172)

 

사업으로서 장의업은 일정 유형의 '존엄성'을 팔아서 발전했다. 가족들에게 존엄성이란 잘 조율된 마지막 순간, 잘 매만져진 시신으로 완성된 순간을 누리는 것이다. 장례를 주도하는 사람은 무대 감독처럼 그날 저녁에 있을 전시 행사를 책임빈다. 이 쇼의 스타는 시신이며, 감독은 제4의 벽이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관객이 시신과 소통하다가 환상이 꺠지는 일은 없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p.178)

 

아무리 내가 여러 번 레토르트용 작은 빗자루로 세라믹 표면의 틈새 부분까지 싹싹 쓸어낸다 해도, 시체 하나하나를 태운 부스러기는 흩어진다. 노력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는 은색 가루를 하나하나 모으려고 시도해보았다. ... 한 번은 화장로를 쓸어내는 동안 뜨거운 뼛조각 하나가 튀어 올랐다. 나는 우연히 그걸 밟았는데, 신고 있던 장화의 고무바닥의 깊숙한 곳까지 타서 구멍이 났다. "이런 제길!" 난 소리쳤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홱 움직여 그 뼈를 화장로 저편까지 포물선 모양으로 높이 차 보내버렸다. ... 당신도 언젠가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p.194)

 

골든게이트에서 투신한 사람들의 시체가 만에 빠진 다음 어디로 가는지는, 강물의 흐름이 이들을 어느 방향으로 실어가느냐에 달려 있다. ... 우주항공 엔지니어는 로켓 과학자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마린 카운티의 맨션 한 채를 살 수 있는 부자였겠지만, 남쪽으로 떠내려갔다. 그의 여동생 말에 따르면,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본 적 없는 노축자는 북쪽으로 떠내려가 돈 많은 마린 카운티 교외로 갔다. 다리 밑 강물의 흐름은 그들 각각의 지위를 몰랐다. (P.199)

 

포르투갈어에는 영어에 딱히 해당하는 말이 없는 단어가 하나 있다. '사우다지(saudade')이다. 이는 향수와 광기,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아픔이 섞인 그리움을 말한다. (p.218)

 

부패액의 냄새를 맡아보는 특권을 가져보지 않은 독자 여러분을 위해 설명하자면, 인체가 썩어가는 첫 신호는 시디신 감귤 뒤에 감추어진 감초 냄새가 나는 것이다. 이 때 감귤은 신선한 여름 감귤이 아님을 명심하라. 그보다는 공장에서 제조된 오렌지 향의 욕시리용 스프레이를 코에 바로 쏜 것 같은 냄새다. 거기에 하루 묵어 파리가 꼬이기 시작한 시큼한 백포도주 한 잔을 부어보라. 그 꼭대기에다 햇볕에 놓아두었던 생선 한 양동이를 부어보라. 친구들이여, 이것이 인체의 부패라는 것이다. (p.226)

 

시체는 바로 유기적으로 분해되는 간단한 구의를 입 채 땅속으로 들어가고, 남은 사람들은 그 자리를 표시할 돌 하나만 달랑 세운다. 그러면 분해를 통해 그 원자가 다시 우주로 되돌아가 새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이 매우 빠르게 진행된다.
자연 매장은 환경보호적으로 사멸하는 가장 건전한 방법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산산조각 나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는 두려움을 갑절은 감소시킨다. (p.236)

 

시신에게는 누가 기억해주는 게 필요하지 않다. 사실 시신에겐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거기 누워 부패해가는 것은 행복 그 이상이다. 시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유족 당사자'이다. 시체를 바라보면서, 그 사람이 떠났으며 이제 더 이상 삶이라는 경기에서 활동하는 선수가 아님을 안다. 시체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보고, 자기 자신오 언젠가는 죽을 것임을 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스스로 알아차림을 부르는 것이다. 그서은 지혜의 시작이다. (P.249)

 

1961년에 [비정상 사회심리학 저널]이라는 잡지에 실린 한 논문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곱 가지 이유를 나열했다.
1. 내 죽음으로 친척들과 친구들이 슬퍼할 것이다
2. 내 모든 계획은 끝장날 것이다.
3. 죽는 과정이 힘들 수도 있다.
4. 나는 더 이상 아무 경험도 하지 못할 것이다.
5. 나는 더 이상 내게 딸린 사람들을 보살필 수 없을 것이다.
6.만일 내생이 있다면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날지 두렵다.
7.죽은 후에 내 몸이 어떻게 될 지 두렵다. (p.334)

 

피가 내 혈관 속을 돌아 그 밑에 깔린 부패한 시첻ㄹ 위로 흐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살아 있다, 있을 수도 있는 많은 내일을 품은 채로. 그렇다, 지금 세운 여러 계획들은 내가 죽고 나면 산산조각 나버리거나 미완성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나는 육체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를 선택할 수 없고, 오로지 정신적으로 어떻게 죽을지만 선택할 수 있다. 죽음이 28세에 찾아오든 93세에 찾아오든, 나는 만족한 채 무(無)로 돌아가 스스로 미끄러져 죽기로 선택했다. 그래서 내 몸을 이루는 원자가 나무들을 가린, 바로 그 안개가 되도록 말이다. 죽음과 묘지의 정적은 형벌이 아니라 잘 살아낸 삶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p.336)